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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HEUNG CITY시흥역사문화유산

시흥시 연혁

시흥시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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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의 년대(시대) 별 연혁 제공
년대(시대)연혁
475(고구려 장수왕 63) 장항구현, 매소홀현
757(신라 경덕왕 16) 장구군, 소성현
고려시대 장구군 ⇒ 안산현 ⇒ 안산군,
소성현 ⇒ 경원군 ⇒ 경원부
조선시대 안산군 ⇒ 안산현 ⇒ 안산군,
경원부 ⇒ 인주 ⇒ 인천군 ⇒ 인천도호부 ⇒ 인천부
1914. 03. 01 시흥군, 부천군
1973. 07. 01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
1979. 08. 10 시흥군 수암면 6개리, 군자면 7개리가 반월출장소로 편입
1980. 12. 01 소래면이 소래읍으로 승격
1983. 02. 15 시흥군 소래읍 옥길리 및 계수리 일부가 부천 및 광명으로 편입
1989. 01. 01 시흥군 소래읍, 수암면, 군자면이 시흥시로 승격(법률 제4050호)
1991. 01. 15 매화동(무지, 과림) 일부가 중림출장소로, 신관동(하중), 목감동(하상, 능곡, 광석), 안산동(화정), 거모동(장현, 장곡) 일부가 연성출장소로 각각 분소(시조례 제230호)
1991. 09. 01 중림, 연성출장소가 각각 동으로 승격(시조례 제282호)
1992. 01. 01 신관동을 신현동으로, 중림동을 과림동으로 명칭 변경(시조례 제291호)
1994. 07. 01 거모동을 군자동으로 명칭 변경(시조례 제374호)
1995. 04. 20 시흥시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및 화정동 일부가 안산시에 편입(대통령평 제14629호)
1995. 11. 15 무지동을 무지내동으로 명칭 변경(시조례 제423호)
1999. 09. 27 정왕동을 정왕1동, 정왕2동으로 분동(시조례 제573호)
2002. 03. 02 정왕1동, 정왕2동을 정왕1동, 정왕2동, 정왕3동, 정왕4동으로 분동(시조례 제694호)
2003. 12. 23 정왕1동을 정왕본동, 정왕1동으로 분동(시조례 제764호)
2010. 09. 20 연성동을 연성동과 능곡동으로 분동(시조례 제1132호)
2014. 03. 01 연성동을 연성동과 장곡동으로 분동, 군자동을 군자동과 월곶동으로 분동(시조례 제1356호)
2018. 10. 08 정왕4동을 정왕4동과 배곧동으로 분동(시조례 제1743호)
2021. 07. 05 배곧동을 배곧1동과 배곧2동으로 분동(시조례 제2022호)
2023. 07. 03 정왕2동을 정왕2동과 거북섬동으로 분동(시조례 제2239호)

고대

  • 일찍이 백제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오늘날의 시흥시 지역은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고구려에 편입되었고, 이 때의 시흥시 남쪽 지역은 ‘장항구현(獐項口縣)’, 북쪽 지역은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매소홀현과 장항구현은 그 뒤 백제 성왕 29년(551)에 백제가 잠시 지배력을 회복하면서 다시 백제의 영토로 환원되었으나,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게 되자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 한 후, 지방 편제를 9주 5소경과 군현제로 개편하였고,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기존의 지명을 중국식 한자 지명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장항구현은 ‘장구군(獐口郡)’이 되면서 군으로 승격하였고, 매소홀현은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어 율진군(栗津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 고려시대 오늘날 시흥시의 남쪽 지역이었던 장구군은 태조 23년(940)에 ‘안산현(安山縣)’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제25대 충렬왕 34년(1308)에 문종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안산군(安山郡)’으로 승격되었다. 북쪽 지역이었던 소성현은 숙종 대에 인예태후의 출신지라 하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고, 인종 때에는 순덕왕후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다가, 이어 공양왕 2년(1390)에 왕이 조상을 추승하는 의미에서 ‘7대 어향(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었다.

조선

  • 「동여도」(19세기 후반)에 보이는<br/>오늘날 시흥시 영역 사진

    「동여도」(19세기 후반)에 보이는
    오늘날 시흥시 영역

  • 조선시대의 안산군 현종 4년(1633)에 온양의 전패(殿牌)를 훔친 생이(生伊)라는 자의 태생지라는 이유 안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안산군으로 환원된 것 외에는 그 명칭에 특별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세조 9년(1463)에 강희맹이 진하사로 중국을 방문하였다가, 남경의 전당지에서 새로운 품종의 연꽃씨를 가지고 귀국하여 오늘날 하중동에 소재한 관곡지에 심은 후, 이 연꽃이 인근에 널리 퍼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세조 12년(1466)부터 ‘연성(蓮城)’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경원부는 태조 원년(1392) 인주로 환원되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인천군(仁川郡)’으로 개칭되었다. 이 후 인천군은 세조 5년(1459) 정희왕후의 외향이라는 이유로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숙종 14년(1688), 승려 여환(呂還)이 모반을 꾀하였을 때, 이에 가담했던 승려 이(怡)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인천현으로 강등되었다. 숙종 23년(1697)에 다시 인천도호부로 환원되었다가, 순조 12년(1812)년에 진채(振采)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인천현으로 강등되었고, 순조 22년(1822)에 인천도호부로 환원되었다.

근현대

  • 위성에서 본 오늘날의 시흥시 사진

    위성에서 본 오늘날의 시흥시

  • 고종 32년(1895)에 전국의 지방제도가 8도제에서 23부제로 개편됨에 따라, 이 때 안산군은 인천부 안산군으로, 인천도호부는 인천부 인천군으로 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편제됨에 따라, 인천부 안산군은 경기도 안산군으로, 인천군은 인천부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통해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는데, 이 때 우리시의 남쪽 지역이었던 안산군의 경우, 폐지되어 시흥군의 군자면과 수암면이 되었고, 북쪽 지역이었던 인천부의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의 경우 부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73년 7월, 당시까지 부천군 소래면에 속해 있던 우리시 북쪽 지역은 부천군의 소사 지역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으로 편입되었고, 1980년 12월, 소래면은 소래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시흥군의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었고, 승격 당시 시흥시는 9개 행정동에 33개 법정동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1991년 9월, 중림출장소와 연성출장소가 각각 중림동과 연성동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 4월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과 화정동 일부가 안산시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시화지구 개발로 정왕동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자 1999년 9월, 2002년 3월, 2003년 12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정왕동이 정왕본동과 1,2,3,4동으로 분동되었으며, 2010년 9월, 능곡주택지구 개발로 인해 능곡동이 연성동에서 분리되었다. 2014년 3월 장곡동이 연성동에서, 월곶동이 군자동에서 각각 분리되었고, 2018년 10월 배곧동이 정왕4동에서 분리되었다. 2021년 7월 배곧동이 다시 배곧1동과 배곧2동으로 분리되었으며, 2023년 7월 정왕2동에서 거북섬동이 분리되어 2023년 현재 시흥시는 20개 행정동에 31개 법정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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